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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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3. 13.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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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 만에
우리는 모두 오랜만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 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詩人 : 김광규(金光圭)
1941년 서울 출생
1964년 서울대 독문과, 동대학원 졸업
1975년 <문학과 지성> 여름호에 시 발표
1979년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펴냄
1981년 제1회 <녹원문학상>, 제5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1983년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 펴냄
1984년 제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1986년 시집 <크낙산의 마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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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아니 살아 남는 것...
매일 한 걸음 한 걸음 깊숙한 늪으로 빠져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패배란 죽음과 같다...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싸움...
그 과정에서의 변절과 타협...
죽음과 같은 패배속의 삶...
패배속의 성공적인 삶...
혼란 속에 질서 있는 무질서.....
그리고 도살장에서의 생존......
[ 소리 : 권정구 - 바람이 전하는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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