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 김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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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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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테 안경을 낀 얼굴, 그리고 기타를 둘러멘 채 구부정하게 서 있는 사내. '김수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다. 어리숙해 보이는 외모지만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천재성을 가진 우리 시대의 장인 김수철. 그를 두고 사람들은 작은 거인이라 부른다.

통기타가 대유행이던 1970년대에 중고교 시절을 보낸 사람 치고 통기타 한번 뚱땅거려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30년에 가까운 날들을 음악과 함께 살아온 그의 첫시작도 그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1972년, 형의 기타를 빌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곡들을 하나씩 마스터해 나가는 것이 그 시절 그가 가장 몰두했던 일. 그렇게 그가 기타라는 악기에 한창 맛을 들여갈 무렵 다가온 지미 핸드릭스(Jimi Hendrix)의 음악은 그를 일렉트릭 기타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CCR, Grand Funk Railroad, James Gang, Deep Purple의 연주를 하루에 10시간이 넘도록 따라하며 속주 실력을 기르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는 작곡까지 시작했던 어린 뮤지션. 하지만 그의 탁월한 작곡 실력 만은 결코 만만치가 않은 것이어서 그가 [작은 거인 1집]을 통해 발표한 곡들 대부분이 바로 이 시절에 만든 곡들이다. 그는 학창시절 이미 미 8군과 동두천, 무교동 등의 업소에서 나이를 속인 채 연주활동을 하며 실력을 키워나갔고 광운공대에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개시하며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 같은 프로그레시브 락에 심취하게 된다.

그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드러나게 된 것은 1978년 전국 대학축제 경연대회를 통해서였다. 당시 4인조 '작은거인'(리드기타&보컬:김수철, 건반:김근성, 베이스:정원모, 드럼:최수일)을 결성해 두 달 간 합숙훈련을 하며 소리를 맞춰 온 이들은 이 대회에서 '일곱빛깔 무지개'라는 곡으로 대상을 차지하면서 일약 대학가의 스타로 떠올랐다. 젊은이다운 파워풀한 사운드에 호소력 있는 보컬로 청중을 사로잡은 '작은거인'은 1979년 1집, 1981년 2집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국내 락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고 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한편 김수철은 '작은거인'의 일원으로서의 활동 못지 않게 개인적으로 작곡에도 힘을 쏟아 1979년부터 81년까지 3년 연속으로 MBC 국제 가요제에 입선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음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반대는 누그러들지 않아 그는 잠시 음악활동을 멀리 하게 되는데 이 때 빠져든 것이 바로 영화다. 1980년 김종원, 송승환, 진유영 등과 어울려 소형 영화 클럽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프랑스 청소년 영화제에 16mm 영화를 출품, 본선에 오르기까지 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그에게는 '우리의 것'에 대한 자각이 생겨나게 된다. 서양의 것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는 그들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것, 우리 소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훗날 국악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국내 락음악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며 기대를 모았던 그룹 '작은거인'. 하지만 김수철을 비롯한 멤버들 모두가 각각 진로를 달리함으로써 그룹은 해체되고 김수철은 1983년 솔로로 전향하게 된다. 김수철은 당시 음악활동을 접기로 마음 먹고 그간의 음악생활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1집을 발표하는데 이 앨범이 예상 외의 큰 인기를 얻으며 최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바람에 그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된다. 이 솔로 앨범 하나로 열 한 개의 크고 작은 상을 수상한 그는 이 즈음부터 80년경 싹트기 시작한 우리 소리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못 다 핀 꽃 한 송이'로 최고 인기 자리에 올라 있던 그는 이 자리를 마다하고 당시 중앙대 교수이던 박범훈 교수로부터 정식 레슨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86년 그는 자신의 4집 앨범을 통해 그간 갈고닦은 우리 음악과의 접목을 시도하면서 국악과 양악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활동범위를 넓혀 전방위적인 음악활동을 펼쳐나가게 되는데 영화, 드라마, 연극, 무용, 행사 음악 등에서 그의 뛰어난 작,편곡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들 음악에서 역시 우리 소리를 응용한 독특한 음악세계를 선보이는데 1986년 아시안 게임 전야제의 피날레 음악에서는 국악과 락의 조화를 꾀하며 '기타산조'라는 연주곡 작업을 선보여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는 단순한 가수가 아닌 진정한 뮤지션으로 평가받으며 가수활동과 다양한 음악작업 병행하게 된다. 1988년에는 자신의 음악생활 12년을 기념하는 음반을 발표하고 89년에는 국내 최초로 작사·작곡·편곡은 물론 드럼, 건반, 기타 등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한 원맨밴드 앨범을 발표하는가 하면 91년에는 오랜 만에 30여명의 연주인들과 함께 그룹 음악을 선보이며 8집앨범을 발표한다(그는 이 앨범을 '작은거인 3집'이라 부를 정도다).

그의 이러한 음악활동에 있어 중심축이 되는 것은 언제나 국악이었다. 1987년 처음으로 국악앨범 [0의 세계]를 발표해 음악계의 호평을 받아낸 것을 비롯, [88 Seoul Olympic 기념앨범], [황천길], [불림소리 I,II] 그리고 98년 [팔만대장경]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의 반응을 염두에 두지 않고 우리 소리에 대한 실험과 탐구를 계속해온 그가 가장 관심을 쏟는 부분이 바로 국악의 대중화. '어떻게 하면 우리 국악을 쉽게, 즐겁게 만들 수 있을까'하는 것이 그의 고민이며 '평생 소리에 관심을 갖고 살겠다. 우리 소리에 배어있는 즐거움을 현대인들에 맞게 전달하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다. 국악의 대중화에 있어 그의 가장 큰 공헌이라면 바로 1993년 영화 [서편제]의 사운드트랙을 발표한 일일 것이다. 영화 속 사소한 시퀀스나 장면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쳐낸 이 앨범은 영화의 성공과 함께 7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국내영화음악 사상 최고의 판매고를 기록, 그가 쏟아온 노력의 결실을 맺게 된다(국악을 바탕으로 한 그의 영화음악은 94년의 [태백산맥], 96년의 [축제], 97년의 '창'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밖에도 어린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온 그는 어린이 드라마와 TV 만화영화 주제가를 통해서 그 자신의 속에 내재해 있는 동심을 꺼내보이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치키치키차카차카'로 시작하는 '날아라 수퍼보드'. 그는 이들 노래들을 엮어 95년에는 [어린이 노래집]을 내기도 했다. 또한 연기에도 재능을 보여 1983년에는 영화 [고래사냥]에 병태 역할을 맡아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94년에는 영화 [금홍아 금홍아]에서 화가 구본웅역을 맡아 개성 있는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대중음악인 가운데 그이만큼 꾸준하게 음악활동을 보여온 이가 몇이나 될까. 어느 한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락, 국악, 클래식, 재즈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자신 만의 음악세계를 넓혀가고 있는 김수철. 때로는 생활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단 한번의 타협조차 거부하며 진정한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장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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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김수철 - 태백산맥(대금),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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