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 정치인, 지도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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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나는 기독교인 이었다...
현재는 종교계를 떠난 무교인 이다.

사심없이 많은 종교인, 정치가, 지도자가 경청 했으면 좋겠어서
일요일 아침에 글을 올려 본다...



법정스님 - "소유의 비좁은 골방"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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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경전에도 보면 수도자는 먼저 가난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보리심이나 어떤 진리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온갖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욕망과 아집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외부에 가득 차 있는 우주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소유물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스스로를 우주적인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맑은 가난, 곧 청빈이다.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예로부터 깨어있는 정신들은 늘 자신의 삶을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가꾸어 나갔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에 못지 않게 인생의 중요한 몫이다. 인간은 안으로 충만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 잡념없이 기도를 올릴 때 자연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때는 삶의 고민 같은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 내 마음이 넉넉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초라하고 궁핍하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을 잃어 버렸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 있다. 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산길을 지나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그 꽃을 통해서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

또 다정한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전화 한 통을 통해서도 나는 행복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데 있지 않다...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생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청빈의 화신이다. 또 진정으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생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삶을 살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모자람이 아니고 충만이다.

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 그 원뜻은 나눠 가진다는 뜻이다. 청빈의 상대개념은 부가 아니라 탐욕이다. 한자로 '탐貪'자는 조개 '패'위에 이제 '금'자이고, 가난할 '빈貧'자는 조개 패 위에 나눌 '분'자이다. 탐욕은 화폐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고, 가난함은 그것을 나눈다는 뜻이다. 따라서 청빈이란 뜻은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옛사람들은 어렵고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길 줄 알았다.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았다.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그래서 생긴 말이다. 가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며 산다는 뜻이다. 그 지혜를 우리가 배워야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옛 시조가 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나 혼자 살기 위해 지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중에서 한 칸만 차지하면 되는 것이다. 나 한 칸, 달 한 칸에, 맑은 바람에게도 나머지 한 칸을 주었다. 집이 비좁으니까 강과 산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위에 둘러두고 보겠다는 것이다. 이 시조야말로 청빈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문명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그렇지만 자연은 사람을 소생시켜 준다.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 때 사람은 시들지 않고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선사는 그이 오두막을 두고 이렇게 노래한다.

벽이 무너져 남죽이 트이고
추녀가 성글어 하늘이 가깝다.
쓸쓸하다고 말하지 말게.
바람을 맞이하고 달을 먼저 본다네.

스스로 선택한 청빈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삶의 어떤 운치이다.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내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 내 자신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일부이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 길은 인간의 길이고 꼭대기에 이르는 길이다. 내리막길은 쉽고 편리하지만 그 길은 짐승의 길이고 구렁으로 떨어지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평탄한 길만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십 년 이십 년 한 생애를 늘 평탄한 길만 간다고 생각해보라. 그 생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그것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르막길을 통해 뭔가 뻐근한 삶의 저항 같은 것도 느끼고, 창조의 의욕도 생겨나고, 새로운 삶의 의지도 지닐 수 있다. 오르막길을 통해 우리는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거듭 태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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